기회가 왔을때 잡아야한다.

내가하고 싶은 말... 2019. 3. 24. 19:45

낡고 고루한 이야기 일지 모르나, 기회가 왔을때 잡아야한다. 2019.3 이번여행도 그랬던것 같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지만, 참 뜻깊은 일정이었다.

2018년의 끝에 즈음하여.

내가하고 싶은 말... 2018. 11. 16. 18:03

한동안 블로그 관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가장큰이유는 역시나 자신이 바쁘다는 핑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블로그를 정리하지 않은동안 많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016년12월에 교토,고베,오사카를 필두로

2017.4월에는 도쿄와 요코하마에 벚꽃을 보고, 이노카시라공원과 지브리미술관을 다녀온것, 그리고 처음으로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오프닝시리즈(요코하마:요미우리전)를 본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2017.7월에는 운이좋아 구름한점 없는 날씨속에 하시마섬(군함도)를 다녀온것이 큰 수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큐슈북부의 지자케도 구경을 하고, 북큐슈4현(후쿠오카,나가사키,구마모토,오이타)를 모두 돌아본 수확이 있었습니다.

2017.12월에는 아이누의 땅 홋카이도의 끝 아바시리를 다녀왔습니다. 드넓은 오호츠크해 멀리 보일듯하는 유빙은(유빙은 사실 2월이되어야 보입니다.) 그옛날 조선시대"표주록"이 생각날 만큼의 그런 모습이 었습니다.

2018.1월에는 운이좋아 잠깐 도쿄를 다녀올 수 있었고, 2018.7월에는 배를 타고 오사카를 거쳐 도쿄까지왕복하며 시즈오카, 요코하마등 도카이도 지역을 다녀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여정들을 여기에 다 기록을 하게되면 그만큼도움이 되실것이라 생각하나 게으름의 끝에서 어찌할줄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18년도에 다녀본곳은 특히나 기억에 크게 남아 차후에 기록을 해보겠습니다.

그저 운이 좋은관계로 여러곳을 둘러보면서 나름의 지식을 얻었으나, 전문가 분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고 잘못된 지식을 제가 알고 함부로 전하는것이 아닌가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궁금한것들을 물어주신다면 언제든 저는 열려있으니 최대한 성심껏 대답해드리겠습니다.

*2016년도 여름에 시모나다 역을 여행간것에 네일동에서 어떤분이 링크를 걸어주셔서 많은분들이 정보를 얻어가신듯합니다. 그런것이야 언제든 환영입니다만 한줄이라도 서로 안부를 이야기 해주시면 정보를 적어둔 저로서도 참 고마울것 같습니다. 정보공유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새로운루트] 일본여행의 새루트를 살펴보자

내가하고 싶은 말... 2016. 3. 15. 17:08

하술할 이내용은 2015년 7/18 CASSIOPEIA님의 철도블로그에서 그 내용을 발췌 편집 및 재구성을 일부한 내용임을 먼저 출처로 밝힙니다.
http://jtinside.tistory.com/m/post/7322

일본의 여행은 우리나라에게는 그야말로 지리적으로 가까운나라라는 입지조건으로 많은 관광객이 오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급증으로 그 숫자는 적을지언정 단적으로 오사카시내를 가보더라도 한국인을 찾기는 어렵지 않은 실정입니다.
그런데, 직장인의 신분으로, 혹은 학생의 신분으로, 혹은 비용의 문제등으로, 혹은 마음에 맞는 친구의 일정문제로 가까운나라기때문에 긴시간을 두고 여행을 하는 관광객은 의외로 적은 편이지요.(​물론 유럽처럼 한번가면 비행기표가 아까워 길게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때문에 대부분의 관광객이 그러하듯 대도시권인 도쿄, 오사카, 혹은 한국과 가까운이유로 후쿠오카 등을 여행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이렇게 되니, 생각보다 일본은 자주 오고갔으나 천편일률적인 지역만을 방문하게되고, 각자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는것입니다. 물론 이런 여행이 나쁜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미처 못가본곳을 찾아가볼 수 있고, 인상이 깊었던 곳을 되밟아 가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해외여행이 아무리 보편화 되었다 하지만 '비용'이 쉽게 결단을 내릴만한 것은 아니기때문에 여행계획을 면밀히 짜보는게 중요한것이며, 가본곳 보다는 새로운곳을 찾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측면에서 일본역시 우리나라와 비슷한 지리적환경(​지진,화산빼고, 아 방사능도있네​)을 가지고 있어서 지방으로 가면 볼것이 없다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볼것이 없다는 단점을 나름극복하고자 여행권역을 관광청에서 나눈듯합니다.(​아무리 나쁜놈들이지만 이런건 좀 배워야겠다.​)


이렇게 7코스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중 가선 절대안되는코스도 보인다. 절대가선 안되는 코스에대해선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본여행에서 기차여행을 소개하는 영상물들도 많은데 어김없이 등장하는 루트들이 저 7개 동선중에 거진다 있습니다. 일본전역이 아니냐라 생각하실 수 있는데 오사카,나고야를 제외하면 대도시권역은 "비교적" 비켜나가있네요.
1번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겨울의 유빙 즉 빙하코스와 여름의 쿠시로습원, 습지대 구경코스입니다. 거기에 범주를 조금 더 늘리면 후라노의 라벤더 꽃밭, 다이세츠산의 스키장등이 포함되겠네요.(​하지만 여기도 방사능이 제로라 하기는 거시기하니 비추​)
2번은...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번은 대도시권역인 나고야와 호쿠리쿠지방을 연결하는 부분인데 호쿠리쿠신칸센이 개통되며(​물론 나고야가는거랑은 상관없다​) 비교적 최근들어 증가세입니다. ​그러나 여기도 방사능이 비교적 무섭긴 매한가지
4번은 간사이지역인데 워낙 한국인들이많이가는 지역입니다. 여기또한 설명이 필요 없으나, 교토이북이나 비와호주변으로 가는 루트는 비교적 적으므로 새로운 코스로 괜찮아보입니다. 오사카지역을 여행을 다녀오신분들이라도 오사카나 교토로 숙소를 잡고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7번.. 왜 갑자기 7번이냐면 여기도 한국사람들이 익숙한곳이기 때문입니다만, 큐슈를 둘로 나누어 북큐슈는 한국사람들이 익숙하나 남큐슈는 비교적 적었습니다. 이부분은 2015.7 제가 남큐슈를 직접 다녀보며 일본의 지방도시들도 볼것이 꽤 많음을 알게 된 계기입니다.
5번 세토우치.
여기는 산요-산인지역+시코쿠일부등의 일본의 내해라 할 수 있은 세토우치주변의 관광입니다.
2016년3월현재 모 관광회사에서는 일본자유여행테마를 일본소도시투어로 잡고 소도시들의 여행을 권하는데, 세토우치지역에 면한 거점되는 도시들(ex:히로시마, 오카야마, 마쓰야마, 타카마츠 등)은 한국인들의 발길도 많지만 타지역보다는 비교적 적은 편이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6번 시코쿠
이곳은 홋카이도와 ​지금은 갈 수 없는 도쿄 저위에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시골이라는 느낌을 받는 동네입니다만, 그런상황이 상황인지라 각종사철 및 JR에서도 관광열차를 열심히 굴리며 관광객을 유치하려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죄다 단선철도자나? 아마안될거야​)

권역을 나누어보면 아직은 가볼만한 곳이 많아보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디로 가보시겠나요?
대도시가 아니더라도 볼곳은 찾아보면 아직 많은것 같습니다.

독도에 관한 짧은 내생각

내가하고 싶은 말... 2014. 2. 4. 15:36

*이글은 대학생활당시(2005년) 간단한 레포트로 내가 쓴글을 편집한것입니다.(펌은 출처를 밝혀주시길바랍니다.) 읽어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독도문제는 항상 이슈화 되었던 문제였던것 같습니다...대부분이 독도문제를 안용복이후 "근대"문제로, 1905년 을사늑약이후의 문제로 치부하는것에 안타까워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시기의 독도문제에 대해서 정리한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한번쯤은 나는 항상 한번쯤은 의문에 빠지곤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근·현대가 아닌 고·중세의 시기에도 영토의 구분이 명확하였는가? 에 대한 의문이다. 흔히 중·고등학교 시절에 보던 역사부도를 살펴보면, 각 나라별 영토와 그 크기가 나타나있다. 나는 항상 이런 부분이 의심스러웠다. 과연 고대나 중세의 각국의 영토는 실제로 역사부도 내용 그대로일까? 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름대로 고증을 하고 찾아본 고구려의 영토나, 백제의 영토도 사실은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실증적인 해석을 하고, 판단하기에 따라 다른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이러한 시기는 오래된 일이라 역사적 근거가 상대적으로 미비하고, 오늘날의 영토의 개념과도 조금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생각해볼 때 독도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독도가 일본과의 본격적인 분쟁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정확히 말해서 구한말의 시기부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이전의 시기에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문제는 일본과 우리나라간의 문제로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식민침탈의 시기부터 시작해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문제가 서서히 들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평소에도 고·중세사를 좋아한 나로서는 이러한 독도의 문제를 역사적 근거를 들어서 한국의 영토임을 한번 입증해보고 싶었다. 특히 현존하는 거의 모든 독도의 문제를 다루는 서적과 논문, 그리고 여러 자료들이 단순한 일본과 한국간의 현재의 상황 속에서 분쟁의 문제와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역사적인 근거도 물론 고·중세의 내용은 많이 미약하지만, 대부분 근·현대사의 자료만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아쉬웠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기회를 통하여 흔히들 알고 있는 독도의 일본영유권의 문제에 앞서 보다 실증적이고 철저한 역사적인 증거와 사료비판, 그리고 독도의 가치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부인하는 국민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역사적인 근거로 독도가 한국의 영토인지 설명을 하라고 한다면, 아마 몇 명 말을 못할 것이다. 사실 독도에 대해서는 예부터 우리나라의 수많은 관찬, 사찬사서 모두 등장을 하고 있으며, 기록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일일이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쉽게 알고 있는 부분은 《三國史記》에 등장하고 있는 이사부장군의 이야기일 것이다. 《三國史記》에 의하면‘여름 6월에 우산국 귀복하다. 우산국은 명주(현 강릉)의 정동에 있는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혹은 이름 하여 울릉도라 한다. 고 되어있다. 울릉도라는 명칭과 함께 등장하는 우산국의 설명으로 이것이 가장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울릉도의 명칭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다. 울릉도는 세월이 지나서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릉도, 또는 우릉도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지만, 독도는 우산도라고 확실하게 조선시대부터 불리었으며, 또한 그것이 조선시대에 발행된 각 지도에서 등장하고 있다. 특히, 《萬機要覽》 군정편 (1808년 일본에서 편찬)에 이르길 ‘흥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지(地)이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보면, 조선시대에 우산도라 부르던 독도의 명칭이 일본인들이 송도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독도가 적어도 조선시대 이전에는 우산도로 불렸음을 알 수 있으며, 예전부터 우산국이라 불리던 울릉도와 함께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써 이미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독도의 영유권 문제는 오히려 울릉도를 한국의 영토를 확실하게 인정함으로서 반박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울릉도가 한국의 영토임에 부인을 하는 국가는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다. 따라서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언급을 하면 현재 일본이 부르고 있는 독도의 명칭 즉, 죽도라는 말은 원래 근대 이전에는 울릉도를 지칭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1880년대 일본해군이 울릉도를 정찰하고 나서 죽도에서 송도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에 울릉도가 송도가 되었으며, 이름을 상실한 독도는 서양 사람들이 이전시기에 발견한 이름인 ‘리앙쿠르 바위’로 지칭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구한말 시기에 이르면, 일본이 독도를 편입하기 위하여 죽도로 명칭하고 빼앗기에 이르지만, 적어도 그이전의 시기까지는 리앙쿠르 바위(rock)로 불리었던 것 이다. 여하튼 결과적으로는 《삼국사기》만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일본의 허황된 근거를 논리 있게 입증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肅宗實錄》의 안용복의 이야기에서도 울릉도에 속에 있는 부속도서로 송도 즉, 독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世宗實錄》지리지에도 무릉과 우산의 명칭으로 각각 울릉도와 독도가 명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고대의 국가의 영토의 명칭과 그 강역은 얼마나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고증을 통해서 밝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짐을 알 수가 있다. 독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간단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독도가 이미 1500여 년 전에 신라의 영토에 포함된 우산국의 부속영토로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한국의 ‘고유영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시대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우산국은 그 후 어떠한 발전을 하고 있었을까? 남북국의 시대에 울릉도와 독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서는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이미 신라에 편입된 우산국이므로 정기적으로 신라에 공물을 납부하고 생활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신라의 군현의 일부로서 직할의 통치를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高麗史》에 의하면 ‘왕(의종)이 동해가운데 울릉도라는 섬이 있는데 땅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며 옛날에 주현을 두었고 가히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신하를 파견하여 조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하였을 때 이미 신라시대에 우산국은 신라에 편입되어 주현과 같은 중앙의 통치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발해와 울릉도 독도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사서도 전혀 없으며, 이야기도 없다. 하지만, 나의 추측으로는 독도가 분명히 발해의 사신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있어서 중간기착지로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해양사 연구》를 통해서 동해바다를 항해하는 발해의 사신들과 고구려의 군대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북서계절풍이 부는 겨울철이 일본 쪽으로 항해하기에 쉬우며 동남쪽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발해의 남경(논란이 있으나 함경남도 북청으로 가정하자)에서 출항을 하면, 재미있게도 독도의 부근 해역을 지나게 된다. 물론 그 당시 울릉도는 사람이 사는 유인도이지만, 독도는 무인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인들은 독도를 찾아서 발견하였을 것이며, 이곳을 중간기착지로 사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19C 초의 여러 서구 열강들의 함대가 동해바다를 항해하면서 손쉽게 독도를 발견하였다는 사실에 미루어 보았을 때 당시의 발해인들도 어렵지 않게 독도를 찾았으며, 이를 활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발해인들이 독도 쪽으로 항해가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밑에 고려시대의 여진족과 관련하여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신라를 이어받은 고려역시 우산국을 고려의 영토로 인식, 통치하였던 것이다. 물론 고려태조의 시기에 ‘울릉도가 방물을 바치고,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고려태조가 처음 실시한 유화정책과 간접통치정책을 울릉도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우산국이란 명칭을 버리고 고려사에 울릉도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울릉도가 그의 부속도서인 독도와 함께 고려정부의 통제 속에서 국가개념이 아닌 군현, 또는 주현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시대에 고려의 정책방향에 따라서 여러 가지방향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음을 파악해 볼 수 있다. 태조이후 현종 대에 이르게 되면, 여진의 침입으로 인해서 울릉도가 황폐해짐을 볼 수 있다. 소위 ‘동북여진’이라 불리는 여진의 무리들로 인하여 농업이 피폐해지고, 피난민들이 본토로 건너오는 일들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조정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농기구를 지원하고, 울릉도에서 피난 온 주민들을 다시 귀환시키도록 왕명을 하달하였으며, 3년이 지나도록 귀환하지 않은 백성들은 관청에서 양식을 조달하고 예주(현 영덕)에서 살도록 하였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고려에서는 울릉도의 주민들을 국가의 백성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여진에 대비하여 울릉도 백성들을 구휼할 대책까지 세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파악해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울릉도까지 여진족들이 진출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진족은 기마민족으로서 배를 타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진족이 배를 타고 울릉도로 와서 약탈을 하였다는 것은 여진인들이 발해의 옛 전통과 문화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발해를 구성하던 피지배층은 대부분이 말갈족으로 여진이 이를 계승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여진족들의 일부는 발해의 항해술을 그대로 소지하였음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발해인들에 의한 독도의 중간기착지의 문제에 신빙성을 더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후 여진의 문제에 대해서는 고려정부에서 강력하게 대응을 하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덕종의 치세에는 울릉도에 성을 쌓고 성주를 임명하는 등 강경책을 취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중앙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여진의 침입도 사라지고, 다시금 평화가 찾아오게 되자, 정부에서는 울릉도를 명주도(강원도)에 속하게 하고, 지방 행정권으로 편입하였다. 그리고, 의종시대와 무인정권의 시대에 이르게 되면, 울릉도는 이전시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의견을 수용하여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섬의 정착을 장려하였다. 또한 최충헌도 진귀한 나무와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을 울릉도로 보냈으나, 바다가 험하고 배가 항해하기 어려워서 포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 울릉도 독도에 관한 내용은 태조의 시기에는 지방호족들의 포섭과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울릉도를 똑같이 취급하였으며, 그 후 여진족의 울릉도 침입이후에는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살도록 권장하면서, 울릉도를 요새화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 후 평화의 시기가 계속되면서 울릉도를 직접통치에서 명주도의 관할의 간접통치로 변환하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이주시키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고려왕조의 노력과 결실이 울릉도와 독도를 계속하여 그들의 영토로 보존하고 노력하였음을 보여주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기록에서는 울릉도나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내용은 없으며, 오히려 울릉도의 주민들이 일본으로 표류하였는데, 이를 고려의 속민으로 표기하고 있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에 있어서 예전부터 우리의 영토임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었으며, 명확한 역사적인 근거로서 울릉도와 독도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시대에 이르게 되면,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독도를 이해하게 된다. 물론 조선왕조 초기에는 태종임금의 울릉도·독도의 공도화정책과 대마도의 정벌을 통해서 왜구의 방지와 울릉도·독도에 대한 통치권의 확립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세종대에 이르게 되면, 구체적으로 울릉도의 옆에 있는 섬인 독도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독도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인식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 이후 안용복이 등장하기 전까지 삼봉도라 부르던 적도 있었으며, 삼봉도라 불리던 독도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쉽게 말해서 조선시대에 이르게 되면, 비록 공도화정책으로 인해서 울릉도와 독도에 주민들이 상주하지 않게 되었지만, 실제로도 몰래와서 살던 사람들이 빈번하였고, 또한 조선정부에서도 독도와 울릉도가 모두 조선의 영토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독도의 개별적인 섬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사안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독도는 완벽하게 한국의 영토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泰山不辭土壤 河海不擇細流

내가하고 싶은 말... 2012. 6. 16. 14:31

泰山不辭土壤 河海不擇細流

태산불사토양 하해불택세류

사마천이 쓴 사기 이사열전에 등장하는 말이다.

태산은 작은 흙더미도 마다하지 않고, 황하(河)와 바다 즉, 큰 물줄기들은 작은 물줄기를 마다하지 않았기에 큰 강과 바다가 되었다는 뜻이다.

옛 중국에서 강을 지칭하는 단어는 河와 江이다. 河는 황하를 지칭하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화북지방의 가장 큰 강이며, 중국에서도 2번째로 큰 강이다. 江은 장강 즉, 양자강을 뜻하는 말이다. 잘 생각해보자. 양자강을 양하?, 양자하라 부른 적이 있던가? 장강 혹은 江水 등으로 부른 적은 있어도 말이다. 황하역시 황강? 황하강 이라 부르던가?

중국 고대사에 대한 지식이 협소한 나로서는 지명에 대한 유래에 대해서는 전무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양자강 이남의 물줄기는 전부다 江 혹은 水라 지칭하고, 그 이북의 물줄기는 대부분 河 또는 水라 지칭한다. 약간 이야기가 빗나가겠지만 한번 살펴볼까?

우리가 손쉽게 중국의 강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재 구글어스나 혹은 지도책에서 중국의 강들의 한문지명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니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다음의 방법은 번역된 중국고전을 찾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산해경이 있을 것이다.(말 그대로 고대 중국의 강과 산에 대한 고찰이다.) 여기서 좀 더 심층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다면 중국원서를 읽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려우니 나는 사고전서 CD에 있는 수경과 수경주를 보겠다. 그리고 이외에 25사에 등장하는 강의 지명을 찾을 수 있겠으나, 이것은 너무 방대한 양이므로 생략하자.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발생한다. 황하이북 동북3성에 있는 흑룡강 송화강은 왜 河가 아니라 江을 쓰냐...?

너무나 쉬운 질문이다. 요즘 짱깨들이 만리장성도 흑룡강변까지 늘리려고 개XX을 하고 있다만, 간단하게 만리장성을 생각해보자. 백번양보해서 짱깨들 말마따나 진한대 만리장성이 압록강변까지 있었다고 치더라도 송화강은 만리장성을 바깥이다.(물론 만리장성의 끝은 현재 난하변의 산해관이 그 끝이다.) 즉, 고대 짱깨들의 지식에 송화강과 흑룡강의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요하조차, 중국인들은 요하의 중하류만을 알고있었을 뿐 상류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상류는 현재 시라무룬강으로 부르고 있고, 고대이후에는 요나라의 발생지이자 거란족들이 유목을 하던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지식이 없는 중국인들은 모를 수 밖에 없었다. 이역시도 만리장성의 바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경주에 등장하는 모든 강을 나열할 순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황하이북 장성이남의 물줄기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수경주는 만리장성이남, 장강이북의 강을 다루고 있다. 장강이남에 대한 설명은 없다.)

'요하, 난하, 백하, 패수, 열수, 호타수, 장수' 등이며, 황하 이남 장강 이북의 강은 '한수, 회수, 위수' 등이있다. 어느곳에도 강이라 표현한 곳은 없다. 또한 동북공정 프로젝트대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당시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되는 강들은 대부분이 水가 붙는다.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江이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염난수(압록강), 한수(한강), 살수(청천강)등이다. 다만 삼국유사에 안민강이라 하여 요하의 지류를 지칭하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이는 이미 만리장성 바깥의 이야기이므로 관련없으며, 또한 고려시대당시 부르던 이름이다. 다음은 장강이남을 살펴보자.

'민강, 주장강, 홍수, 가릉강'등이 이에 해당한다. 역시 하를 지명으로 쓰는 곳은 없다. 물론 대월사기에 의하면 통킹만 앞바다로 흘러드는 현재 하노이를 지나가는 강을 흑하라 부른기록은 있으나, 이는 베트남의 역사이므로 제외하겠다.

여하튼 부국강병책을 주장한 이사의 말처럼 인재를 가리지 않고 고루등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의 정책이나 실업률, 그리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팔방미인이 많은데 굳이 흠이 있는 사람을 쓰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입사 후 더 큰 곳을 향해 가기위해 자신의 역량과 경험이 크기바쁘게 이직을 해버리며, 한두가지 흠이 있는 사람은 그 빈자리에 들어가려해도 그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저 또 다른 팔방미인을 뽑게 되는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역사대로 사람의 삶이 흐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서 말하는 바와 그에 따른 결과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국가경쟁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서 그저그런 순으로 '정체현상'을 빚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물론 우수한 사람이 더많은 소득을 얻고, 더잘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렇지 못한사람들이 단지 자신들이 설정한 그 기준에 도달되지 않는다 하여 배척하는 것은 과거의 진나라가 행한 나쁜것과 무엇이 다를까...?

어떤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그 분야에 대한 분명한 남들과 다른 지식이 있다. 그것을 다른 재능이 부족하다 하여 배척해선 안될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대통령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로 걸어다니기도 불편했던 사람이었다. 스티븐 호킹 박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여기에 A와 B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A는 스페인어를 전혀할줄 모르지만, 멕시코의 사정과 역사, 현지정보, 지도 및 길찾기 안내 등을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B는 단지 스페인어만을 할줄아는 사람이라 하자. 우리나라에서는 B라는 사람을 뽑아서 멕시코로 보낼 것이다. A라는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역경을 거쳤기에 스페인어도 모르는데 정보를 잘알고 있는지 알려하지 않는다. 그저 길치이고, 슬럼이나 뒷골목에서 배웠거나 혹은 단지 회화만을 할줄아는 사람을 뽑아버린다. 해당직무에 대한 지식여부보다 해외출장이라 하면 일단 말이 되는 사람을 써버린다. 물론 언어는 중요하다. 잘해야 대화가 되고, 그것이 기본이 되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다른 능력이 안되면서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 일을 하겠다는 것은 분명히 위험한 사고라 생각한다. 그래서는 안된다. 애초에 번역할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원문이 아닌 번역된 책을 읽고 있지만, 그 책을 통해서 많은 견문을 익히고 있다.

나는 사자처럼 살고싶다. 굶어죽을지언정 풀은 뜯지 않겠다. 하지만 so what? 그래서 뭐? 그래, 내가 굶어죽는다 한들 신경쓰는 사람이 있기나 한거냐...?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나는 내꿈을 위해서 태산이 흙하나를 포기하지 않듯, 바다가 작은물줄기도 마다하지 않듯, 사소한 2%를 찾겠다. 그것이 나에게 경쟁우위로서 다가올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