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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의 미래는 과연?
이글은 2013.5 월 쓴것을 편집 작성한것 입니다
막걸리가 주춤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한류열풍을 타고 막걸리가 최근 5-6년간 "잘"팔려 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막걸리 주요 수입국인 일본의 엔저와 국내 영세규모의 막걸리 업계의 타산성문제, 이에따른 기업식 논리의 원가절감위한 원재료 삭감으로 막걸리는 일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 주요 주류 즉, 소주, 맥주, 막걸리의 수출량 역시 급감하는 추세이다. 그리고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수입맥주 및 사케가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내생각으로는 타겟팅의 문제라 생각한다. 한류열풍을 타고 막걸리를 팔 생각이었다면, 주식의 단타처럼 짧은 시간에 유행일때 판매한후 접어야한다. 물론 영세적인 기업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공부"해야한다. 잠시 이야기가 빗나가겠지만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기존의 가진것을 빼앗기기싫어하는 본성에 기인한다. 세계는 무한자유경쟁이며, 이기기위해서는 공부하고 노력해야한다. 공부하지않고 기득권을 잃을것 같으니 반대하는것은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다... 잠시이야기가 어긋났지만 막걸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놈들은 최소한 자기네들의 니혼슈 즉 사케에도 다양한 등급과 맛, 도정율, 아미노산도, 니혼슈도, 스윗과 드라이의 차이, 원재료의 차이등 다양한 품종으로 고객의 니즈에
부합하려한다. 그럼에도 일본자국에서는 사케가 점점 하락세이다. 그런일본시장상황에서 단지 한류라는 이름만 걸고 아스파탐, 스테비오사이드등 화학조미료 범벅 막걸리를 누가먹을것이며, 증류식소주원액 1%도 안들어간 소주는 왜먹을 것이며, 보리비율 10%대의 발포주를 왜먹을 것인가???
그나마 이유는 딱하나 가격이었다. 단위가격당 알콜섭취의 금액이 납득할만큼 싼가격이었으니 외국사람들도 우리술을 마셨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기업은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집단이므로 제품의 질도 중요하지만 이익을 내는 것이 관건이다. 이익을 내기위해선 영업, 마케팅, 품질, 홍보 등등 다양한 노력이 필요한데,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공산품의 특징은 품질은 온데간데없고, 유명인과 혹은 범용, 관습, 예전부터 이래왓던 타성에 호소하는 마케팅이었다. 그결과 소비자들도 똑똑한 구매자가 되지못하고 항상 그래왔던 것을 고르게 되는 것이다.
수입자동차가 10%넘을 동안 국내자동차 내수시장은 붕괴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품질개선보다는 마케팅과 프로모션으로 해결하려한다.
수입맥주가 국내맥주를 잠식하고 있지만, 맥주 양사는 자신들도 수입맥주 면허가 있어서인지 국내산맥주 보리비율을 미공개하고 밀가루 맥주를 만든다.
막걸리는 아스파탐 조미료 덩어리인걸 모르면서 마시면서, 사케는 보통주에도 조미료가 들어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마시고 있다. 생산자, 판매자, 소비자 모두가 문제다.
더욱이 안타까운것은 수입맥주가 더 맛있어서 먹는다면서 그네들이 마시는 수입맥주를 보면 역시나 가격이 싸거나 혹은 국내공장에서 만들거나 혹은 전분이 들어간 수입맥주를 마신다. 라거와 에일의 구분도 모르고 그저 혀끝에 닿으면 좋은게 좋은거랍시고 마신다. 물론, 판매자입장에선 좋다. anheuser-busch inbev사는 아마 한국고객들에게 큰절을 할지도 모르겟다. 퀄리티는 모르고 그저 수입이면 오케이하고 마시는 소비자덕분에...ㅋ
사케도 주정이 들어간 사케는 청하와 다를게 전혀없음에도 뭔가 맛이 틀린것같다는 주관적인 정황증거로 단정지어버린다...
소주도 희석식과 증류식을 모르고 우리는 오늘도 "주정"과 "밀가루"를 먹으면서 "다이어트"걱정한다~
대~충 살려면 살면된다. 하지만 이왕사는거 알고먹으면 더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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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고속철(THSR패스) 구입 TIP입니다.
이글은 네이버카페 '즐거운 대만여행~'에서 2014.7월 제가 대만타이페이현지에서 올린글입니다. 카페에서도 충분히 언급이되고 보충되어, 위키에도 소개될만큼 도움이 되어 찾으신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에 조금 더 내용을 보충하고 도움드리고자 제 블로그에 전문 및 추가사항을 올려봅니다.
많은 도움 되시길 바랍니다
2015년부터 국내에서도 인터넷 등으로 하나투어에서 고속철패스권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편하게 구입하시고, 국내에서 미처 구입하시지 못한분들은 여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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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몇번 찾아봤는데 없어서 제가 오늘 소화한 일정 언급해드리고자합니다.
대부분 이카페에서 대만여행계획하시는분들은 5일이내분들이 많으시고, 타이페이 인근여행하시는분들이 다수입니다. 하지만 사람욕심이 그렇지 않듯, 길든 짧든 대만에 왔는데... 다른도시도 한번 구경이라도해봐야지 하시는분들 많으실겁니다.
그래서 대만 남쪽 도시 타이중 타이난 가오슝등을 계획하시는분들은 여행 처음가시는분들이 아니거나 혹은 아예 대만으로 출국을 가오슝으로 하시는 분들일겁니다.
사실 저는 과거에 일본 JR패스로 신칸센을 몇번타봤기에 대만고속철도도 패스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행떠나기전에 고속철 홈페이지를 보고 3일권 2400불 판매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만, 이것이 국내에 팔지않는다는 이유로 국외 사용자들의 전유물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만관광청에 자문을 구하니
"한국관광객은 한국현지에서는 구입이 불가능합니다. 그대신 타이페이 오셔서 동남여행사에서 직접 구매하실수 있습니다"
라는 답변을 얻었습니다.
동남여행사는 타이페이 처잔역에서 탄수이선타고 2코스가면 나오는 쐉렌역 1번출구에서 80미터 정도 떨어져있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쐉렌역에서 출구나오시자마자 오른쪽으로 80미터쯤 가면 큰사거리 나옵니다. 그 사거리에서 그대로 직진해서 길건너자마자 오른편보면 세븐일레븐 보이고, 그 세븐일레븐 오른쪽에 빌딩입구 있는데 그 빌딩6층이 동남여행사입니다.
(*추가로 팁하나 더드리자면 쐉렌역에서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걸어가시면 빵집이 하나있습니다. 한글로 파인애플케익(펑리수)무슨 대회에서 1등했다며 써놨습니다. 그빵집 찾으셨다면 계속직진하시면 됩니다. 빵집이름이 생각이 안나네요. 선물용으로 사오시는 펑리수들은 다 만들어져 포장된것을 우리가 먹는거지만 거기는 빵집에서 바로 구워서 나오는거라 퀄리티나 맛자체가 차원이 달랐습니다. ㅎ)
3일권 2400대만달러입니다(2015.8월현재)
*플랙시블 3일권(3일선택가능권) : 3200대만달러
일반열차(고속철, 츠창하오제외)5일권 : 2800대만달러
5일간 일반+고속철 같이이용권 : 3600대만달러(단, 고속철은 2일만 이용가능)
그리고 여행사에서 받은 패스권에 이름 여권번호 기재후 타이완처잔 고속철매표소에서 이를 제시하면 패스카드를 만들어줍니다.
궁금점 있으신것 추가올려드리겠습니다.
자유석 및 지정석 둘다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유석을 이용시엔 2번째사진에 있는 교부받은 패스권을 개찰구에 보여주고 통과후 열차 10~12호차에 앉으시면됩니다. 열차 출발 후 승무원이 물어보면 어디간다고 물어보는 것이니 어디간다고 말해주면됩니다.(타이중, 줘잉 등)
저는 주로 지정석을 이용했는데요. 지정석은 표사는곳에 줄선 후 차례가 오면 패스권과 함께 목적지를 말해줍니다. 그러면 몇시차를 탈것인지 알려주며 남은좌석 등을 보여줍니다. 그 후 원하는 시간대에 표를 달라고 하면됩니다. 시간이 20분이내 임박할 경우에는 3열에 앉아서 다소 불편하게 갈 수 있으나, 1시간 혹은 30분이상 남은 열차의 경우 2명이 간다면 2열좌석에 앉을 수 있을겁니다. 지정석의 경우 역무원이 패스권 뒷면에 여권같은 공란이 있는데, 여기에 날짜, 열차번호, 타는기차역, 목적지기차역, 열차번호, 좌석번호, 예약번호, 역무원 확인 스탬프 등을 기재 후 돌려줍니다. 이후 개찰구에서 패스권과 여권(보여달라는데도 있고 그냥 통과도 있습니다만, 왠만하면 보여달라고합니다.)을 보여주고 통과하여 기차에 타면됩니다.^^
저는 3일간 타이페이>타이난 왕복 타이페이>줘잉 왕복, 타이페이>타이중 왕복 등 6회이상 타보았습니다.
시내로 들어가는법은 다른곳에도 많이 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만, 간단히 알려드리자면
타이중고속철도 역에서 지하로 내려가면 버스타는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THSR셔틀버스라고 써있는 버스가 몇대있습니다. 버스번호가 있고 옆에 셔틀버스라 되어있습니다. 2-3종류가 있는데, 동해대학까지 바로가는 버스있습니다. 고속철도 패스 제시하면 동해대학까지 타이중고속철역에서 바로 가실 수 있습니다. 또 한대는 타이중 중산공원, 즉, 타이중 시내로 가는버스입니다. 공자묘등을 가시려면 참고하시면됩니다.(가격은 무료입니다!!!ㅋ)
타이난고속철역은 일반철도역하고 바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일반철도역에서 타이난처잔까지 가실수있고, 타이난처잔까지 요금은 이지카드로 지불되니 부담없습니다.^^타이난 처잔에서 내리시면 길건너편에서 버스를 타시면 안핑구바오등으로 갑니다.
마지막 줘잉은 교통도 편리하고 가오슝MRT도 있으므로 어렵지않습니다. 컨딩등을 가시는분은 일반버스타러 나가듯이 출구나서면 나서자마자 컨딩가는 버스매표소 있습니다.
MRT는 역내에서 바로 연결통로로 이동하셔서 타실수있습니다. ^^
*추가 팁 드리겠습니다. 동남여행사 주소입니다.
台北市中山區中山北路2段71號 6F
(위 주소는 구글지도에서 그대로 붙이면 위치 확인가능합니다)
*我們想買兩張高鐵三日券 (우리 고속철도 3일패스권 2장을 구매하고 싶다)
저도 한문은 읽지만 중국어(대만)는 전혀할줄모르기에 대만관광청에 문의하고 얻은답변 여기에 붙여두겠습니다.
兩을 숫자로 一,二,三,四 등으로 적으시면 매수인듯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패스권을 구매하고 타이페이처잔에서 개통해 오늘 타이난을 다녀왔습니다. 내일은 가오슝을 가볼까합니다. 얼리버드등으로 고속철 티켓을 싸게구입하시는분들이 많지만
타이페이>가오슝(쭤잉) 편도가 1500불정도하는걸 감안하면 가오슝만 왕복해도 본전뽑는패스임을 알수있습니다.
다들 참고하시어 대만여행에 도움되길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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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 관한 짧은 내생각
*이글은 대학생활당시(2005년) 간단한 레포트로 내가 쓴글을 편집한것입니다.(펌은 출처를 밝혀주시길바랍니다.) 읽어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독도문제는 항상 이슈화 되었던 문제였던것 같습니다...대부분이 독도문제를 안용복이후 "근대"문제로, 1905년 을사늑약이후의 문제로 치부하는것에 안타까워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시기의 독도문제에 대해서 정리한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한번쯤은 나는 항상 한번쯤은 의문에 빠지곤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근·현대가 아닌 고·중세의 시기에도 영토의 구분이 명확하였는가? 에 대한 의문이다. 흔히 중·고등학교 시절에 보던 역사부도를 살펴보면, 각 나라별 영토와 그 크기가 나타나있다. 나는 항상 이런 부분이 의심스러웠다. 과연 고대나 중세의 각국의 영토는 실제로 역사부도 내용 그대로일까? 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름대로 고증을 하고 찾아본 고구려의 영토나, 백제의 영토도 사실은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실증적인 해석을 하고, 판단하기에 따라 다른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이러한 시기는 오래된 일이라 역사적 근거가 상대적으로 미비하고, 오늘날의 영토의 개념과도 조금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생각해볼 때 독도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독도가 일본과의 본격적인 분쟁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정확히 말해서 구한말의 시기부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이전의 시기에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문제는 일본과 우리나라간의 문제로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식민침탈의 시기부터 시작해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문제가 서서히 들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평소에도 고·중세사를 좋아한 나로서는 이러한 독도의 문제를 역사적 근거를 들어서 한국의 영토임을 한번 입증해보고 싶었다. 특히 현존하는 거의 모든 독도의 문제를 다루는 서적과 논문, 그리고 여러 자료들이 단순한 일본과 한국간의 현재의 상황 속에서 분쟁의 문제와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역사적인 근거도 물론 고·중세의 내용은 많이 미약하지만, 대부분 근·현대사의 자료만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아쉬웠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기회를 통하여 흔히들 알고 있는 독도의 일본영유권의 문제에 앞서 보다 실증적이고 철저한 역사적인 증거와 사료비판, 그리고 독도의 가치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부인하는 국민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역사적인 근거로 독도가 한국의 영토인지 설명을 하라고 한다면, 아마 몇 명 말을 못할 것이다. 사실 독도에 대해서는 예부터 우리나라의 수많은 관찬, 사찬사서 모두 등장을 하고 있으며, 기록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일일이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쉽게 알고 있는 부분은 《三國史記》에 등장하고 있는 이사부장군의 이야기일 것이다. 《三國史記》에 의하면‘여름 6월에 우산국 귀복하다. 우산국은 명주(현 강릉)의 정동에 있는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혹은 이름 하여 울릉도라 한다. 고 되어있다. 울릉도라는 명칭과 함께 등장하는 우산국의 설명으로 이것이 가장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울릉도의 명칭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다. 울릉도는 세월이 지나서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릉도, 또는 우릉도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지만, 독도는 우산도라고 확실하게 조선시대부터 불리었으며, 또한 그것이 조선시대에 발행된 각 지도에서 등장하고 있다. 특히, 《萬機要覽》 군정편 (1808년 일본에서 편찬)에 이르길 ‘흥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지(地)이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보면, 조선시대에 우산도라 부르던 독도의 명칭이 일본인들이 송도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독도가 적어도 조선시대 이전에는 우산도로 불렸음을 알 수 있으며, 예전부터 우산국이라 불리던 울릉도와 함께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써 이미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독도의 영유권 문제는 오히려 울릉도를 한국의 영토를 확실하게 인정함으로서 반박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울릉도가 한국의 영토임에 부인을 하는 국가는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다. 따라서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독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언급을 하면 현재 일본이 부르고 있는 독도의 명칭 즉, 죽도라는 말은 원래 근대 이전에는 울릉도를 지칭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1880년대 일본해군이 울릉도를 정찰하고 나서 죽도에서 송도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에 울릉도가 송도가 되었으며, 이름을 상실한 독도는 서양 사람들이 이전시기에 발견한 이름인 ‘리앙쿠르 바위’로 지칭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구한말 시기에 이르면, 일본이 독도를 편입하기 위하여 죽도로 명칭하고 빼앗기에 이르지만, 적어도 그이전의 시기까지는 리앙쿠르 바위(rock)로 불리었던 것 이다. 여하튼 결과적으로는 《삼국사기》만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일본의 허황된 근거를 논리 있게 입증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肅宗實錄》의 안용복의 이야기에서도 울릉도에 속에 있는 부속도서로 송도 즉, 독도가 포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世宗實錄》지리지에도 무릉과 우산의 명칭으로 각각 울릉도와 독도가 명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고대의 국가의 영토의 명칭과 그 강역은 얼마나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고증을 통해서 밝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짐을 알 수가 있다. 독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간단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독도가 이미 1500여 년 전에 신라의 영토에 포함된 우산국의 부속영토로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한국의 ‘고유영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시대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우산국은 그 후 어떠한 발전을 하고 있었을까? 남북국의 시대에 울릉도와 독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서는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이미 신라에 편입된 우산국이므로 정기적으로 신라에 공물을 납부하고 생활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신라의 군현의 일부로서 직할의 통치를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高麗史》에 의하면 ‘왕(의종)이 동해가운데 울릉도라는 섬이 있는데 땅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며 옛날에 주현을 두었고 가히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신하를 파견하여 조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하였을 때 이미 신라시대에 우산국은 신라에 편입되어 주현과 같은 중앙의 통치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발해와 울릉도 독도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사서도 전혀 없으며, 이야기도 없다. 하지만, 나의 추측으로는 독도가 분명히 발해의 사신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있어서 중간기착지로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해양사 연구》를 통해서 동해바다를 항해하는 발해의 사신들과 고구려의 군대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북서계절풍이 부는 겨울철이 일본 쪽으로 항해하기에 쉬우며 동남쪽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발해의 남경(논란이 있으나 함경남도 북청으로 가정하자)에서 출항을 하면, 재미있게도 독도의 부근 해역을 지나게 된다. 물론 그 당시 울릉도는 사람이 사는 유인도이지만, 독도는 무인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발해인들은 독도를 찾아서 발견하였을 것이며, 이곳을 중간기착지로 사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19C 초의 여러 서구 열강들의 함대가 동해바다를 항해하면서 손쉽게 독도를 발견하였다는 사실에 미루어 보았을 때 당시의 발해인들도 어렵지 않게 독도를 찾았으며, 이를 활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발해인들이 독도 쪽으로 항해가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밑에 고려시대의 여진족과 관련하여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신라를 이어받은 고려역시 우산국을 고려의 영토로 인식, 통치하였던 것이다. 물론 고려태조의 시기에 ‘울릉도가 방물을 바치고,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고려태조가 처음 실시한 유화정책과 간접통치정책을 울릉도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우산국이란 명칭을 버리고 고려사에 울릉도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울릉도가 그의 부속도서인 독도와 함께 고려정부의 통제 속에서 국가개념이 아닌 군현, 또는 주현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시대에 고려의 정책방향에 따라서 여러 가지방향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음을 파악해 볼 수 있다. 태조이후 현종 대에 이르게 되면, 여진의 침입으로 인해서 울릉도가 황폐해짐을 볼 수 있다. 소위 ‘동북여진’이라 불리는 여진의 무리들로 인하여 농업이 피폐해지고, 피난민들이 본토로 건너오는 일들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조정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농기구를 지원하고, 울릉도에서 피난 온 주민들을 다시 귀환시키도록 왕명을 하달하였으며, 3년이 지나도록 귀환하지 않은 백성들은 관청에서 양식을 조달하고 예주(현 영덕)에서 살도록 하였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고려에서는 울릉도의 주민들을 국가의 백성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여진에 대비하여 울릉도 백성들을 구휼할 대책까지 세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파악해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울릉도까지 여진족들이 진출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진족은 기마민족으로서 배를 타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진족이 배를 타고 울릉도로 와서 약탈을 하였다는 것은 여진인들이 발해의 옛 전통과 문화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발해를 구성하던 피지배층은 대부분이 말갈족으로 여진이 이를 계승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여진족들의 일부는 발해의 항해술을 그대로 소지하였음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발해인들에 의한 독도의 중간기착지의 문제에 신빙성을 더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후 여진의 문제에 대해서는 고려정부에서 강력하게 대응을 하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덕종의 치세에는 울릉도에 성을 쌓고 성주를 임명하는 등 강경책을 취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중앙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여진의 침입도 사라지고, 다시금 평화가 찾아오게 되자, 정부에서는 울릉도를 명주도(강원도)에 속하게 하고, 지방 행정권으로 편입하였다. 그리고, 의종시대와 무인정권의 시대에 이르게 되면, 울릉도는 이전시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의견을 수용하여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섬의 정착을 장려하였다. 또한 최충헌도 진귀한 나무와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을 울릉도로 보냈으나, 바다가 험하고 배가 항해하기 어려워서 포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 울릉도 독도에 관한 내용은 태조의 시기에는 지방호족들의 포섭과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울릉도를 똑같이 취급하였으며, 그 후 여진족의 울릉도 침입이후에는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살도록 권장하면서, 울릉도를 요새화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 후 평화의 시기가 계속되면서 울릉도를 직접통치에서 명주도의 관할의 간접통치로 변환하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이주시키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고려왕조의 노력과 결실이 울릉도와 독도를 계속하여 그들의 영토로 보존하고 노력하였음을 보여주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기록에서는 울릉도나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내용은 없으며, 오히려 울릉도의 주민들이 일본으로 표류하였는데, 이를 고려의 속민으로 표기하고 있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에 있어서 예전부터 우리의 영토임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었으며, 명확한 역사적인 근거로서 울릉도와 독도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시대에 이르게 되면,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독도를 이해하게 된다. 물론 조선왕조 초기에는 태종임금의 울릉도·독도의 공도화정책과 대마도의 정벌을 통해서 왜구의 방지와 울릉도·독도에 대한 통치권의 확립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세종대에 이르게 되면, 구체적으로 울릉도의 옆에 있는 섬인 독도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독도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인식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 이후 안용복이 등장하기 전까지 삼봉도라 부르던 적도 있었으며, 삼봉도라 불리던 독도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쉽게 말해서 조선시대에 이르게 되면, 비록 공도화정책으로 인해서 울릉도와 독도에 주민들이 상주하지 않게 되었지만, 실제로도 몰래와서 살던 사람들이 빈번하였고, 또한 조선정부에서도 독도와 울릉도가 모두 조선의 영토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독도의 개별적인 섬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사안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독도는 완벽하게 한국의 영토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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